척도의 빈칸, 과연 괜찮을까? (전체 표기 vs 양끝점 표기)
서론: 척도의 빈칸이 말하는 것, ‘전체 표기’와 ‘양끝점 표기’의 선택
당신 앞에 두 개의 만족도 척도가 있습니다. 어떤 척도가 더 명확하게 느껴지십니까?
척도 A: "만족도를 1점에서 5점 사이에서 골라주십시오. (1점: 매우 불만족, 5점: 매우 만족)"
척도 B: "만족도를 골라주십시오. [① 매우 불만족 ② 약간 불만족 ③ 보통 ④ 약간 만족 ⑤ 매우 만족]"
두 척도 모두 5점 척도지만, 응답자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과 해석의 과정은 완전히 다릅니다. 척도 A에서 ‘4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족’일까요, 아니면 ‘보통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일까요? 이처럼 척도의 ‘빈칸’은 응답자에게 해석의 과제를 남깁니다. 반면, 척도 B는 모든 점의 의미를 명확히 정의해 줍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데이터의 품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두 방식의 세계를 각각 탐험해 보겠습니다.
1. 모든 길에 이정표를 세우다: ‘전체 어휘 표기’ 척도의 장점과 과제
‘전체 어휘 표기(Fully Labeled)’ 방식은 이름 그대로, 척도의 모든 점(point)에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는 단어나 구절을 붙여주는 방식입니다.
장점 1 - 모호함의 제거와 해석의 일관성: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모호함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연구자가 ‘4점은 약간 만족이다’라고 명확히 정의해주기 때문에, 응답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가장 일치하는 어휘를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모든 응답자가 각 척도 점을 거의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게 만들어, 데이터의 신뢰도(Reliability)와 타당도(Validity)를 크게 향상시킵니다.
장점 2 - 응답자의 인지적 부담 감소: 응답자는 숫자의 추상적인 의미를 스스로 해석할 필요 없이, 제시된 어휘 중 자신의 감정과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면 됩니다. 이는 응답 과정을 더 쉽고 직관적으로 만들어주며, 고민의 시간을 줄여줍니다.
과제 - 좋은 어휘 개발의 어려움: 하지만 이 방식의 단점은, 특히 7점 이상의 다점 척도로 갈수록 모든 점에 대한 적절한 어휘를 개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약간 만족’과 ‘매우 만족’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적절하고, 간결하며, 다른 보기와 겹치지 않는 단어를 찾는 것은 고도의 언어적 감각을 요구합니다. 또한, 여러 언어로 번역될 때 그 미묘한 뉘앙스가 사라질 위험도 있습니다.
2. 시작과 끝만 알려주다: ‘양끝점 어휘 표기’ 척도의 유혹과 위험
‘양끝점 어휘 표기(Endpoint Labeled)’ 방식은 척도의 양쪽 극단에만 어휘를 제시하고, 그 사이는 숫자로만 남겨두는 방식입니다. (예: 1-매우 불만족, 2, 3, 4, 5-매우 만족)
유혹 (장점):
제작의 편리함: 연구자는 양 끝점의 개념만 정의하면 되므로 척도를 만들기가 매우 쉽고 빠릅니다.
등간격 가정 유도: 중간에 어휘가 없으면, 응답자들은 자연스럽게 1-2-3-4-5의 숫자 간격이 모두 동일하다고(등간격) 가정하고 응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추후 평균(mean)과 같은 통계량을 계산하는 데 있어 중요한 ‘등간 척도(Interval Scale)’라는 가정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험 (치명적 단점):
해석의 주관성 폭발: 이 방식의 가장 큰 위험은 연구자가 척도 점의 의미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한다는 점입니다. 응답자 A에게 ‘4점’은 ‘꽤 만족’일 수 있지만, 응답자 B에게는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다른 ‘내면의 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동일한 ‘4점’ 응답이라도 그 실제 의미는 천차만별이 됩니다.
데이터 신뢰도 저하: 이러한 해석의 주관성은 데이터의 신뢰도를 심각하게 떨어뜨립니다. 특히 문화권에 따라 극단적인 표현을 피하고 중간 숫자에 몰리는 경향이 다르기 때문에, 국가 간 비교 연구 등에서는 데이터 왜곡이 더욱 심해질 수 있습니다.
3. 신뢰도냐, 등간격 가정이냐: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두 방식의 선택은 결국 ‘무엇을 더 중요한 가치로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양끝점 표기’의 주장: “응답자들이 숫자를 등간격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평균 계산이 가능한 양적 데이터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체 표기’의 주장: “평균을 계산하는 것보다, 모든 응답자가 각 척도 점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고 답하게 하여 데이터의 신뢰도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 설령 그 어휘들 사이의 간격이 완벽한 등간격이 아닐지라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정체불명의 숫자보다 낫다.”
수많은 조사방법론 연구들은 후자의 손을 들어줍니다. 응답자마다 제멋대로 해석한 숫자를 모아 평균을 내는 것은, 그 자체로 ‘쓰레기를 넣어 쓰레기를 얻는(Garbage In, Garbage Out)’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왜 ‘모든 점에 어휘를 표기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가
이러한 논의를 종합해 볼 때, 2025년 현대 조사방법론의 **강력한 컨센서스는 ‘가급적 모든 척도 점에 어휘를 표기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데이터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확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더 나은 설계를 위한 실천적 제언
5점 척도와 7점 척도에서는 반드시 모든 점에 어휘를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십시오.
어휘는 대칭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예: 매우 부정적 - 약간 부정적 - 보통 - 약간 긍정적 - 매우 긍정적)
어휘들 사이의 심리적 간격이 최대한 비슷하게 느껴지도록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11점 척도처럼 모든 점에 어휘를 표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양끝점 표기 방식을 사용하되, 그 결과는 평균값이 아닌 ‘상위 N%’, ‘하위 N%’와 같이 그룹으로 묶어서 해석하여 숫자 자체의 주관성을 피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설문은 응답자에게 해석의 부담을 떠넘기지 않습니다. 연구자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각 선택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친절한 설문’이 결국 가장 정확하고 신뢰도 높은 데이터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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