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여론조사와 조건부가치법(CVM)의 올바른 이해
서론: ‘설악산의 가치’는 얼마일까? 가격표 없는 가치에 가격 매기기
우리는 아이스크림이나 자동차처럼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들의 가치는 ‘가격’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맑은 공기, 깨끗한 강, 설악산의 아름다운 풍경, 혹은 멸종위기 동물의 존재 자체와 같이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는 어떻게 화폐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정부가 “설악산 국립공원의 생태계를 완벽하게 보존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매년 1만 원의 ‘환경세’를 추가로 내야 합니다”라는 정책을 고려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정책의 타당성을 평가하려면, ‘연간 1만 원’이라는 비용과 ‘설악산 생태계 보존’이라는 편익(Benefit)의 가치를 비교해야 합니다. 바로 이 ‘가격표 없는 편익’의 경제적 가치를 추정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 바로 조건부가치법(CVM)입니다.
1. CVM은 언제 사용되는가?: 비시장재화와 공공정책의 세계
CVM은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비시장재화(Non-market Goods)’**의 경제적 가치를 측정해야 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그 활용 분야는 매우 다양합니다.
환경 가치 측정: CVM이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영역입니다. 갯벌 보존, 국립공원 지정, 상수원 수질 개선, 멸종위기종 보호 등 특정 환경 정책이나 환경 파괴로 인한 피해액을 산정하는 데 활용됩니다. 1989년 엑손 발데즈호 원유 유출 사고 당시, 파괴된 알래스카의 청정 자연환경 가치를 추정하는 데 CVM이 사용된 사례는 매우 유명합니다.
공공 프로젝트의 타당성 분석: 새로운 고속도로 건설, 공공 도서관 건립, 대규모 도시 공원 조성 등 대형 공공사업을 시작하기 전, 그 사업이 국민에게 가져다줄 편익을 화폐 가치로 추정하여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에 활용합니다.
문화유산 보존 가치 측정: 경복궁이나 불국사와 같은 유형 문화재, 혹은 판소리나 강강술래 같은 무형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이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적 가치와 편익을 주는지를 측정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2. 유일무이한 장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측정하는 힘
CVM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용되는 이유는, 다른 어떤 방법론도 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재화의 가치 중 **‘비사용가치(Non-use Value)’**를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재화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사용가치(Use Value): 직접 사용하고 경험하며 얻는 가치 (예: 설악산 등반, 맑은 공기 마시기)
비사용가치(Non-use Value):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얻는 가치. CVM은 바로 이 가치를 측정하는 데 탁월합니다.
존재가치(Existence Value): 내가 직접 가보지 않더라도, 설악산이나 남극의 펭귄이 온전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느끼는 만족감과 가치.
유산가치(Bequest Value): 해당 자원을 현세대가 아닌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가치.
선택가치(Option Value):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미래에 언젠가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남겨두는 것에서 느끼는 가치.
다른 평가 방법(예: 여행비용법, 자산가치법 등)은 대부분 ‘사용가치’만을 측정할 수 있지만, CVM은 설문을 통해 이러한 추상적인 비사용가치까지 화폐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입니다.
3. 논란의 폭풍 속에서: CVM에 내재된 수많은 편향(Bias)들
CVM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 측정 과정이 실제 시장이 아닌, ‘가상’의 시나리오에 기반하기 때문에 수많은 편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상적 편향 (Hypothetical Bias):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가상의 설문 상황에서는 실제보다 훨씬 더 관대하고 후하게 지불 의사를 밝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경세를 1만 원 내겠다’고 설문에서 답하는 것과, 실제로 내 지갑에서 1만 원을 꺼내 납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전략적 편향 (Strategic Bias): 응답자가 자신의 실제 가치 평가와 상관없이, 정책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답변을 왜곡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보호론자는 해당 정책이 무조건 통과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지불 능력을 초월하는 매우 높은 금액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정보 편향 (Information Bias): 응답자가 제시하는 가치는 설문에서 제공되는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사업의 긍정적 측면만 강조하면 지불의사액(WTP, Willingness to Pay)이 높아지고,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면 낮아집니다.
포괄성 편향 (Embedding Effect): ‘A라는 희귀 새 한 종을 구하기 위해 얼마를 내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와 ‘모든 희귀 조류를 구하기 위해 얼마를 내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응답자들이 제시하는 금액에 큰 차이가 없는 현상입니다. 이는 응답자가 개별 가치를 평가하기보다, ‘환경 보호’라는 막연한 도덕적 만족감에 대해 가격을 매기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결론: 결함 많지만, 대체 불가능한 도구로서의 CVM
결론적으로, 조건부가치법(CVM)은 수많은 편향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그 결과를 맹신해서는 안 되는, 결함이 많은 도구입니다. CVM을 통해 얻어진 ‘OOO원의 경제적 가치’라는 수치를 실제 시장 가격처럼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CVM은 환경 보존이나 문화유산처럼 인류의 ‘비사용가치’가 핵심인 분야의 편익을 측정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2025년 현재, CVM의 현명한 활용법은 그 결과를 절대적인 수치로 보기보다, 가격표 없는 공공재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가치의 ‘규모(Magnitude)’를 가늠하는 하나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삼는 것입니다. 또한, CVM 조사를 설계하고 그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 자체가, 해당 정책에 대한 사회적 공론을 형성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돕는 중요한 숙의(熟議)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즉, CVM은 완벽한 계산기라기보다는,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화를 촉진하는 도구’로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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