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정당은 정향인가, 태도인가
인과 깔때기로 다시 읽는
한국 투표행태 조사
오승호
| 2026년 9월
1.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한 질문
이갑윤 교수의 『한국인의
투표 행태』(후마니타스, 2011)는 1987년 민주화 이후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치러진 대선과 총선 각 네 차례의 조사 자료를 분석한 책이다. 투표
결정 요인을 인구사회학적 변수, 정치적 정향, 정치적 태도, 후보자·이슈 평가의 네 단계로 나누어 차례로 검토했고, 결론부에서 두 가지 명제를 내놓는다.
첫째 명제는 계층에 관한
것이다. 투표 참여와 투표 결정은 물론이고 투표 결정에 영향을 주는 태도와 정향 변수 대부분이 직업, 소득, 교육 같은 계층 변수로부터 독립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구사회학적 변수 가운데서는 출신 지역의 영향이 가장 컸고 연령이 그다음이었다.
둘째 명제는 정당 지지에
관한 것이다. 투표 결정에 큰 영향을 주는 정당 지지 변수는 서구의 정당 귀속감처럼 개인 수준에서나
집합 수준에서나 매우 안정적이고, 다른 정치적 정향과 태도 변수 거의 전부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두 명제 모두 당시 자료로는
설득력 있는 결론이다. 그런데 조사를 설계하고 문항을 만드는 입장에서 다시 읽으면 걸리는 데가 있다. 계층의 영향이 '독립적으로' 없다는
건 어느 모형을 기준으로 한 얘기인가. 여기서 말하는 정당 지지는 어떤 문항으로 잰 것이고, 그 문항이 정말 정향을 재고 있었는가. 이 글은 이 두 질문을 따라가면서, 정향을 재려면 조사표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까지 정리한 것이다.
2. 인과 깔때기라는 틀
이 책의 네 단계 구성은
미시간 학파의 인과 깔때기(funnel of causality) 모형을 한국 자료에 맞춰 옮긴 것이다. Campbell, Converse, Miller, Stokes의 『The
American Voter』(1960)는 투표 선택을 깔때기 끝에 놓고, 그 앞에 여러 요인을 시간 순서대로 배치했다. 가장 넓은 입구 쪽에는
계층, 지역, 종교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이 있고, 그 안쪽에 정당일체감처럼 오래 유지되는 정향이, 다시 그 안쪽에
이슈 입장이나 후보 평가처럼 선거마다 바뀌는 태도가 온다. 앞 단계일수록 안정적이고 투표에서 멀며, 뒤로 갈수록 선거 국면에 따라 움직이고 투표에 가깝다는 가정이다.
투표행태 연구에는 보통 세
학파가 거론된다. 컬럼비아 학파(Lazarsfeld, Berelson
등의 『The People's Choice』, 『Voting』)는 사회집단 소속과 주변 사람의 영향을 중심에 둔다. 로체스터 학파와 합리적 선택 이론(Downs, 그리고 회고적 투표의 Fiorina)은 유권자의 이익 계산과 정부 업적 평가를 중심에 둔다. 인과
깔때기는 이 가운데 미시간 학파의 개념이다. 컬럼비아 학파가 중시한 사회학적 변수를 깔때기 바깥쪽에
흡수하고 정당일체감을 가운데 두었기 때문에 앞의 두 학파를 절충한 모형으로도 읽힌다. 미국 ANES(American National Election Studies)가 이 틀을 바탕으로 설계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투표행태 연구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틀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최근 Achen과
Bartels(2016)가 합리적 선택 쪽의 회고적 투표 모형을 비판하며 집단 정체성과 당파성을 다시 앞세운 것도 미시간 쪽 해석에
힘을 싣는 연구로 분류된다.
실제 분석에서 표준처럼 쓰이는
건 Miller와 Shanks의 『The New American Voter』(1996)가 제시한 단계적
블록 모형이다. 안정적인 사회경제적 특성, 정당일체감과 정책
성향, 현안 선호와 경제 상황 인식, 대통령 업적 평가, 후보 자질 평가, 전망적 평가 순으로 변수 블록을 쌓는다. 각 단계의 총효과는 그보다 앞 단계만 통제한 상태에서 추정한다. 뒤
단계 변수까지 모두 넣으면 앞 단계 변수의 효과가 뒤 단계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이갑윤 책의 네 단계도
이 방식과 거의 같다.
그림 1은 네 단계를 깔때기 모양으로 그린 것이다. 칸 이름은 이갑윤 책의
단계를 따랐고, 칸 안의 변수는 Miller와 Shanks의 블록을 네 칸에 맞춰 묶었다. 아래 점선은 원래 모형에는
없는 역방향 경로로, 4장에서 다시 다룬다.
그림 1. 투표행태의 인과 깔때기 모형과 역방향 경로
3. 계층 변수는 정말 영향이 없는가
첫째 명제를 읽을 때 먼저
확인할 것은 '독립적'이라는 단어다. 직업, 소득, 학력은
연령, 지역과 강하게 얽혀 있다. 한국에서 저학력층은 대부분
고령층이고, 고령층은 보수 정당 지지가 높다. 연령을 통제하면
학력의 효과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학력은 세대마다 작용 방향이 엇갈리기도 한다. 노년층에서는 학력이 낮을수록 보수 성향이 강하고 청년·중년층에서는
학력이 높을수록 진보 성향이 강하다면, 두 방향이 합쳐진 전체 계수는
0 근처로 나온다. 소득은 무응답이 많고 자기 기입 오차가 커서 측정 단계에서부터 효과가
약해진다.
깔때기 모형의 논리로 보면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뒤 단계 변수를 모두 넣은 모형에서 계층 계수가 작다는 건 계층의 효과가 정당
지지나 이념을 거쳐 나타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것은 계층이 정당 지지나 이념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이 책은 정향과 태도 변수 자체도 계층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했으니 뒤의
주장까지 한 셈이고, 그래서 주장이 더 세다.
계층을 무엇으로 재느냐도
결과를 바꾼다. 직업 분류와 소득 구간 대신 주택 소유나 가구 자산으로 재면 효과가 잡힌다는 연구가
이어졌고, 저자 자신도 2013년 「재산이 계급의식과 투표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뤘다. 2010년대에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계층균열이 등장했는지를 묻는 연구(이용마,
2014), 소득 하위층이 보수 후보를 찍는 계급배반투표를 다룬 연구(이종곤, 2015; 오수진 외, 2017), 계급의식과 투표선택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신정섭·김용철·조영호, 2020)가 나왔다. 2011년 책의 결론은 1992~2008년 자료와 직업·소득·학력이라는 측정 방식 안에서 읽어야 한다.
4. '요즘 지지하는 정당'은 태도 문항이다
둘째 명제에서 걸리는 건
정당 지지 변수의 성격이다. 미시간 학파의 정당일체감 문항과 한국 조사의 정당 지지 문항은 문구부터
다르다.
ANES의 원 문항은
"Generally speaking, do you usually think of yourself as a Republican, a
Democrat, an Independent, or what?"이다. '대체로
말해서', '평소',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표현이 붙어 있다. 지금 어느 당이 좋으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느냐를 묻는 문항이다. 한국의 정례 여론조사는 대체로 "어느 정당을 지지하십니까"에 '요즘'이나 '현재' 같은 시점 표현을 붙여 묻는다. 지금 이 시점의 선호를 묻는 것이고, 그 결과를 매주 또는 격주로 대통령 직무 평가와 나란히 발표한다. 표 1은 세 가지 문항을 나란히 놓은 것이다.
표 1. 정당 문항의 문구와 성격 비교
|
구분 |
ANES 정당일체감 |
CSES 정당 근접감 |
한국 정례조사 정당 지지 |
|
문구 |
Generally
speaking, do you usually think of yourself as a Republican, a Democrat, an
Independent, or what? |
Do
you usually think of yourself as close to any particular political party? |
요즘(현재) 어느 정당을 지지하십니까? |
|
시점 표현 |
대체로, 평소 |
평소 |
요즘, 현재 |
|
묻는 것 |
자기 규정(정체성) |
정당과의 심리적 거리 |
지금의 선호 |
|
후속 질문 |
강도, 무당파의
기울기 |
조금 더 가까운 정당, 강도 |
무당층 재질문(기운
정당) |
|
문항 성격 |
정향 |
정향에 가까움 |
태도에 가까움 |
설계부터 태도 문항에 가까우니
실제 움직임도 태도처럼 나온다. 정당 지지율은 사건에 따라 주 단위로 오르내리고, 무당층 규모도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내영·정한울(2007)이 이슈에 따른 정당 지지 변동을 분석한 것도 이
문항이 현안에 반응한다는 사실 위에 서 있다. 당명과 조직이 수시로 바뀌는 한국 정당 체계에서는 특정
정당 이름에 정체성이 붙기도 어렵다. 안정적인 건 특정 정당이 아니라 보수 계열, 민주당 계열이라는 진영 단위의 귀속이다.
그렇다고 한국 유권자에게
정당 정체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장승진·하상응(2022)은 최근 개발된 표현적 당파심 측정 도구를 써서, 한국 유권자의
정당일체감이 이념·정책 거리에서 나오는 도구적 당파심보다 사회 정체성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결과를 냈다. 정체성은 있는데 "요즘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는 문항이 그것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미국에서도 정당일체감이 순수한
정향이냐는 논쟁은 있었다. MacKuen, Erikson, Stimson(1989)은 거시적 정당 지지(macropartisanship)가 경제 평가와 대통령 평가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고했고, Fiorina(1981)는 정당일체감을 정부 업적 평가가 쌓인 누적 기록(running
tally)으로 봤다. 그림 1의 점선이 이
경로다. 반대 방향을 보인 연구도 있다. Lenz(2012)는
유권자가 지지 정당과 지도자의 입장을 보고 자기 이슈 입장을 맞춘다는 것을 보였는데, 이쪽은 깔때기
방향과 일치한다. 미국 문항으로도 정향과 태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데, 한국 문항은 태도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 있다.
역방향 경로는 조사표의 문항
순서와도 연결된다. 깔때기 가정을 그대로 조사표에 옮기면 정당 지지를 먼저 묻고 이슈를 뒤에 묻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이슈 응답이 당파적으로 쏠리는 순서 효과가 생길 수 있다. 반대로
대통령 직무 평가 바로 뒤에 정당 지지를 물으면 방금 한 평가가 정당 응답에 묻어난다. 어느 쪽이든
정당 문항과 평가 문항 사이의 상관은 응답자의 실제 태도 구조와 문항 배치 효과가 섞인 값이다.
그렇다면 이갑윤 책이 정당
지지를 정향 자리에 둔 것은 잘못인가. 한계인 건 맞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크다. 책이 쓴 자료는 대부분 언론사와 조사회사의 선거 여론조사, 학회의
선거 후 조사였고, 선거 예측이 목적인 조사에서 정당 문항은 당연히 지금 어느 당을 지지하느냐였다. 2차 분석을 하는 연구자는 있는 문항을 쓸 수밖에 없다. 저자가
정당 지지와 함께 여야 성향을 분석에 넣은 것도 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보인다. 다만 여야 성향은 1998년 정권교체 이후 여당과 야당의 의미가 뒤집혀서, 여러 시기에
걸쳐 비교하기 어렵다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제약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곳은 정당 지지가 개인 수준에서 안정적이라는 대목이다. 집합 수준의 안정성은 반복 횡단조사로도 보일
수 있지만, 개인 수준의 안정성은 같은 사람을 다시 조사해야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선거 패널조사가 본격적으로 나온 게 2007년 대선 무렵이니, 책이 다룬 기간 대부분은 이 주장을 직접 검증할 자료가 없었다.
지금 이 결과를 다시 읽는다면
정당 지지를 정향이 아니라 매개 변수로 놓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정당 지지를 뺀 모형에서 계층 변수의
총효과가 얼마인지, 정당 지지를 넣었을 때 얼마나 줄어드는지를 비교하면 '계층은 영향이 없다'와 '계층의
영향이 정당 지지를 거쳐 나타난다'를 구분할 수 있다. 선거
직전에 잰 정당 지지는 투표 선택과 거의 같은 것을 재는 셈이라 설명력이 부풀어 보인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성경륭(2015)이 18대 대선을 분석하면서 정당일체감이 대선 후보 지지와
상관이 지나치게 높고 세대, 지역, 이념과 다중공선성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정당일체감 투표를 모형에서 뺀 것도 같은 문제의식이다.
5. 정향은 찬반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다
정당 지지가 태도에 가깝다면, 거꾸로 이슈 가운데 정향에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 낙태가 대표적이다.
Converse(1964)는 대중의 이슈 태도 대부분이 패널 재조사 때 거의 무작위에 가깝게
바뀐다는 것을 보이면서 무태도(nonattitudes)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Converse와
Markus(1979)가 1970년대 패널을 다시 분석했을 때, 낙태 같은 도덕 이슈는 다른 정책 이슈보다 눈에 띄게 안정적이었다.
Carmines와 Stimson(1980)은 정책 수단이 아니라 목표에 관한 것이면서 오래
논쟁돼 온 상징적 이슈를 쉬운 이슈(easy issue)라고 불렀고,
낙태는 이후 연구에서 쉬운 이슈의 대표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정책 지식이 없어도 가치관에서
바로 답이 나오고, 어릴 때 종교와 가정에서 형성돼 잘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향의 조건을 갖췄다.
정확히 말하면 정향은 낙태
입장 자체보다 그 밑에 있는 종교성이나 도덕적 전통주의이고, 낙태 입장은 그 가치가 거의 그대로 드러나는
지표다. 그래서 '여성의 선택권이 우선이냐 태아의 생명이
우선이냐' 같은 일반 입장은 정향처럼 움직이지만, '임신
몇 주까지 허용할 것인가' 같은 구체 정책 문항은 문구와 보기 설정에 따라 응답이 흔들리는 태도 문항이
된다.
정향이 찬반보다 옳고 그름에
가깝다는 감각은 심리학에서도 따로 다뤄 왔다. Skitka와 동료들(2005)의
도덕적 확신(moral conviction) 연구는 같은 찬성이라도
'나는 이게 좋다'로 가진 사람과 '이게 옳다'로 가진 사람이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보였다. 도덕적 확신으로 가진
입장은 취향이 아니라 사실처럼 느껴지고, 다른 사람과 다른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여겨지며, 타협을 거부하고 시간이 지나도 잘 바뀌지 않는다. Rokeach(1973)가
가치(어떠해야 한다)와 태도(어떤 대상이 좋다 싫다)를 구분한 것도 같은 선에 있다.
이렇게 보면 정향이냐 태도냐는
문항 주제가 아니라 응답자가 그 입장을 어떤 방식으로 갖고 있느냐로 갈린다. 낙태 찬성 비율 안에는
선호로 찬성하는 사람과 신념으로 찬성하는 사람이 섞여 있고, 찬반 문항에 '매우', '대체로' 같은
강도를 붙여도 둘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찬반 문항 뒤에 확신 문항을 하나 붙이면 나눌 수 있다. Skitka의 측정 문항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이 문제에 대한 귀하의 입장은 옳고 그름에 대한 귀하의 근본적인 신념과 얼마나 관련되어 있습니까? 1. 전혀
관련 없다 2. 별로
관련 없다 3. 어느
정도 관련 있다 4. 매우
관련 있다 이 문제에서 귀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생각이
다를 뿐이다 2. 틀린
생각을 하고 있다 |
한 가지 구분할 것이 있다. 미시간 학파의 정당일체감은 옳고 그름보다는 '우리 편'이라는 소속감이었다. 정향에는 도덕 판단형과 소속감형이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진영 정체성이 부정적 당파성과 함께 강해지는 현상은 소속감이 '저쪽은
틀렸다'는 도덕 판단과 겹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두 가지 정향이 정당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에서는 엘리트 정당이 낙태를 두고 갈라선 뒤, Carsey와 Layman(2006)이 보였듯 낙태가 중요한 사람은
자기 입장에 맞춰 정당을 바꾸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정당에 맞춰 입장을 바꿨다. 정향과 정당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정렬된 것이다. 한국은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주요 정당이 이 문제로 뚜렷하게 갈라서지 않았다. 낙태 입장은 종교, 성별, 연령과는 묶여도 정당 지지와는 따로 움직인다. 그림 2처럼 한국 유권자의 정향 칸에는 진영 정체성과 도덕 가치
정향이 서로 약하게만 연결된 채 나란히 있고, 투표로 곧바로 이어지는 건 주로 앞의 것이라고 보는 게
실제에 가깝다.
그림 2. 한국 유권자의 두 가지 정향과 투표 선택(개념도)
6. 여러 이슈를 묶어 이념을 잰다
개별 이슈 문항이 흔들리는
이유를 측정오차에서 찾은 연구가 있다. Achen(1975)은
Converse가 보인 불안정성이 응답자에게 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항의 측정오차 때문이라고 반론했다. Ansolabehere, Rodden, Snyder(2008)는 이를 이어받아, 이슈 문항을 하나씩 보면 패널 재조사 때 많이 흔들리지만 여러 문항을 묶어 척도로 만들면 측정오차가 상쇄되면서
정당일체감만큼 안정적이고 투표 예측력도 크게 올라간다는 것을 보였다. 앞의 논의로 옮기면, 개별 찬반은 태도 수준에서 흔들리고 여러 개를 평균 내면 그 밑의 정향이 남는다는 논리다.
다만 이 방법은 문항들이
하나의 차원에 모인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미국은 경제 이슈와 사회 이슈가 정당 정렬과 함께 한 차원으로
묶이는 편이지만, 한국은 대북·안보, 경제 분배, 사회·도덕
이슈가 따로 움직인다. 하나로 합치면 신호가 섞인다. 이갑윤
책에서도 한국의 이념 투표는 서구처럼 여러 사회경제 이슈가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한미 관계나 대북 지원 같은 외교안보 이슈가 결정적인
것으로 나왔다. 한국 자료로는 요인분석으로 차원을 먼저 나누고 차원별 지수를 따로 만드는 게 맞다.
자기평가 이념과 이슈 조합
이념이 어긋나는 문제도 있다. Ellis와 Stimson(2012)은
미국인이 스스로는 보수라고 하면서 개별 정책에서는 진보적 입장을 고르는 현상을 상징적 이념과 조작적 이념의 불일치로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스스로 보수라고 답한 사람 상당수가 복지 확대에 찬성하는 식의 불일치가 흔하다. 자기평가 이념은 소속감형 정향에, 이슈 조합 지수는 가치형 정향에
가깝다고 보면 두 측정치가 서로 다른 것을 재고 있다는 설명이 된다.
한국 조사에서 오래 반복돼
왔고 정향 쪽으로 움직이는 이슈를 차원별로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이념 지수 구성에 쓸 만한 한국의 이슈 후보
|
차원 |
문항 예 |
특징 |
|
대북·외교안보 |
대북 지원과 교류 확대,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동맹 강화, 북한을 협력 대상으로 보는지 경계 대상으로 보는지, 한일관계와
과거사 |
한국에서 이념을 가장 잘 가르는 차원. 수십 년째 같은 방향으로 갈림 |
|
경제 분배 |
성장과 분배의 우선순위, 세금을 더 내더라도 복지를 늘릴지, 대기업 규제,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보호, 부동산 보유세 강화 |
찬성이 쏠리는 주제는 비용을 함께 제시해야 변별력이
생김 |
|
사회·도덕 |
사형제 폐지,
동성혼과 차별금지법, 낙태, 난민·이민 수용, 집회시위의 자유와 사회 질서, 여성할당제 |
옳고 그름 성격이 가장 강함. 정당보다 종교, 성별, 연령과
묶임 |
|
역사 인식 |
이승만·박정희
평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공, 5·18 평가 |
한국 특유의 차원. 세대 경험에서 형성되고 진영 정체성과 가장 가깝게 붙음 |
골라낼 때 빼야 할 문항도
있다. 원전 확대, 검찰개혁, 의대 정원처럼 특정 정부가 추진하면서 정당 간 대립이 생긴 이슈는 응답자가 지지 정당을 보고 답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문항을 이념 지수에 넣으면 정당 지지를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는 셈이 된다. 문구도 '현 정부의 ○○ 정책'이 아니라 '경제성장보다 소득분배가 더 중요하다'처럼 정부나 정당 이름 없이 원칙 수준으로 물어야 시기가 바뀌어도 비교할 수 있다. 응답이 한쪽으로 크게 쏠리는 문항은 척도에 넣어도 변별력이 없으니, 복지
확대처럼 찬성이 압도적인 주제는 '세금을 더 내더라도'처럼
비용을 함께 제시해 묻는다.
7. 정향으로서의 정당 문항은 어떻게 물을까
정당을 정향으로 재려면 문항의
시점을 '요즘'에서 '평소, 대체로'로 넓히고, 선호
대신 자기 규정이나 소속감을 묻는 게 기본이다. 여기에 당명이 바뀌어도 응답이 이어지도록 계열 단위로
묻는 장치를 더한다. 미시간 원 문항은 양당제를 전제로 만들어져 그대로 번역하면 어색하다. 다당제 국가 비교를 위해 만든 CSES(Comparative Study of
Electoral Systems)의 정당 근접감 문항을 기본으로 쓰는 게 낫다. 기본 문항은 2단계다.
|
문1. 귀하께서는 평소 대체로 가깝게 느끼는 정당이 있습니까? 1. 있다 → 문1-1로 2. 없다 → 문1-2로 문1-1. 그 정당은 어느 정당입니까? 문1-2. 그래도 다른 정당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느끼는 정당이 있다면
어느 정당입니까? (98. 없다 포함) 문2. [정당 응답자] 그
정당에 얼마나 가깝게 느끼십니까? 1. 매우
가깝다 2. 어느
정도 가깝다 3. 약간
가깝다 |
2단계 구조 자체는 국내 조사에서 낯설지 않다. 국내 정당 지지 집계는 첫 질문에서 지지 정당이 없거나 모르겠다고 한 사람에게 기운 정당을 다시 묻고, 여기서 특정 정당을 댄 사람을 그 정당 지지로 합쳐 내는 게 관행이다. 달라지는
건 문구의 틀이다. '요즘 지지'가 아니라 '평소 가깝게 느끼는'으로 물어야 같은 2단계라도 정향 쪽을 잰다.
재질문에서 걸러진 사람을
어떻게 다룰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장승진(2015)이 18대 대선 직후 자료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두 번째 질문에서 걸러진
정당 편향층(partisan leaners)은 순수 무당파와도, 첫
질문에서 바로 지지 정당을 댄 사람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특정 정당에 대한 분명한 선호와
함께 주요 정당들에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보인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편향층을 지지층에 합쳐 집계하는
관행은 지지율 산출에는 문제가 없지만, 정향을 분석할 때는 따로 두고 볼 이유가 있다.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재려면 Huddy, Mason, Aarøe(2015)가 사회정체성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당파 정체성 척도를 옮겨 쓸
수 있다. 문1에서 고른 정당(계열)을 넣어 4점 척도로
묻는다.
|
다음 각 문장에 얼마나 동의하십니까? (OO에는 문1에서 고른 정당 계열이 들어감) 가. 누가 OO 계열 정당을 비판하면 나를 비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OO
계열 정당 이야기를 할 때 '그들'보다 '우리'라고 말하게 된다 다. OO
계열 정당 지지자들과 나는 공통점이 많다 라. 누가 OO 계열 정당을 칭찬하면 기분이 좋다 (1. 전혀
그렇지 않다 2. 별로 그렇지
않다 3. 대체로 그렇다 4. 매우 그렇다) |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정당보다
싫어하는 정당이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으니 부정적 당파성도 따로 재 두는 게 좋다.
|
문3. 어떤 경우에도 투표하지 않을 정당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느 정당입니까? 문4. 다음 각 정당에 대한 호감도를
0점(매우 싫다)에서 10점(매우 좋다) 사이로
평가해 주십시오. |
조사표 분량에 여유가 없어
한 문항으로 줄여야 한다면 이렇게 묻겠다.
|
귀하께서는 평소 스스로를 어느 정당 계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더불어민주당
계열 2. 국민의힘
계열 3. 그
밖의 정당 (적어주십시오: ________) 98. 특별히
가깝게 느끼는 정당 계열이 없다 |
'평소'로 시점을 지금에서
떼어 냈고,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으로 선호가 아닌 자기 규정을 물었고, '계열'로 당명이 바뀌어도 응답이 이어지게 했다. '지지'라는 단어를 뺀 건 응답자가 매주 보는 정당 지지도 문항과 같은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없다는 보기를 '무당파'라는
라벨로 쓰지 않은 것도 라벨을 자기 정체성으로 고르는 효과를 줄이려는 의도다. 한 문항으로 줄이면서
잃는 건 기울어진 무당층인데, 98번 응답자에게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쪽'을 한 번 더 묻는 건 응답 부담이 거의 없으니 가능하면 살리는 게 좋다.
문항 위치도 결과를 바꾼다. 대통령 직무 평가나 이슈 문항 바로 뒤에 두면 방금 한 평가가 응답에 묻어나 다시 태도 문항처럼 움직인다. 퓨리서치센터 조사처럼 정당 문항을 성별, 연령, 학력 같은 배경 문항 묶음에 넣어 응답자 특성으로 묻는 방식이 정향 측정 취지에 맞는다. 기존의 '요즘 어느 정당을 지지하십니까'는 현재 선호 지표로 따로 남겨 두면 된다. 두 문항을 함께 넣으면
그 차이 자체가 분석거리가 된다. 같은 응답자에게 두 문항을 모두 넣고 패널로 몇 차례 돌려 개인 수준
일치율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정향처럼 움직이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8. 조사 실무에 남는 과제
정당 지지가 태도에 가깝다는
판단은 가중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 정당 지지나 과거 투표로 표본을 보정하는 방법이 다시 논의되고 있는데, 가중 기준으로 쓰는 변수는 조사 시점의 여론 변화와 무관하게 안정적이어야 한다. '요즘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로 가중하면 표본 구성의 치우침만이
아니라 그 사이 실제로 일어난 여론 변화까지 지워 버릴 위험이 있다. 가중 변수로는 정향형 문항이 더
적합하지만, 그러려면 같은 문항을 꾸준히 묻는 기준 조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갑윤 책의 한계가 자료에서
왔다는 점도 다시 생각해 볼 만하다. 2차 분석을 하는 연구자는 조사회사와 언론사가 만든 문항을 쓸
수밖에 없고, 문항을 바꿀 수 있는 건 조사를 설계하는 쪽이다. 정례조사
한 곳이라도 정향형 정당 문항, 부정적 당파성 문항, 차원별
이슈 문항을 같은 문구로 꾸준히 넣어 두면, 10년 뒤 연구자는
2011년 책의 두 명제를 개인 수준 자료로 다시 검증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정당
문항이 무엇을 재는지 따져 보는 일은 그 자료를 남기는 첫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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