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하십니까?’라는 질문의 함정, 왜 ‘당연한 질문’은 위험한가

 

서론: ‘필요하십니까?’라는 질문의 함정, 왜 ‘당연한 질문’은 위험한가

“소상공인을 돕는 정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청년의 미래를 위한 지원 정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질문들에 ‘아니오’라고 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정책은 거의 없으며, 특히 그 정책의 목표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를 담고 있을 때, 반대하는 것은 마치 인정이 없거나 이기적인 사람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러한 질문들은 항상 90% 이상의 압도적인 ‘필요하다’는 응답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 90%라는 숫자는 정책 결정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배가 고프십니까?”라는 질문에 “예”라는 답을 얻고 만족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 즉 ‘무엇을, 얼마나, 어떤 대가를 치르고 먹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당연한 질문’은 종종 우리를 ‘의미 있는 답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함정이 됩니다.

1. ‘예’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사회적 바람직성과 모호함의 문제

‘필요성’ 질문이 실패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심리적, 언어적 문제 때문입니다.

  1. 사회적 바람직성 편향 (Social Desirability Bias):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때,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하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답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정책’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비정하고 이기적인 태도로 비칠 수 있다는 사회적 압박이 작용합니다. 따라서 응답자는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실효성을 따지기 전에, 그 정책의 ‘대의명분’에 먼저 동의해버립니다.

  2. 개념의 모호성 (Ambiguity): ‘필요하다’는 말은 지극히 모호하고 주관적입니다. 누구에게 필요한지, 어느 정도로 필요한지, 어떤 비용을 감수하고 필요한지에 대한 정의가 없습니다. 응답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기준으로 ‘필요성’을 해석하고 답하게 됩니다. 결국, 연구자는 서로 다른 잣대로 잰 값들을 하나의 결과로 합산하는 심각한 측정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2. ‘필요성’에서 ‘우선순위’로: 순위형 질문이 알려주는 진실

정책 결정자가 진짜로 알고 싶은 것은 특정 정책의 필요성 여부가 아니라, 한정된 예산과 시간 속에서 수많은 ‘필요한’ 정책들 중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가 입니다. 즉,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을 ‘필요성’에서 ‘우선순위’로 전환해야 합니다.

  • 나쁜 질문: “청년 일자리 정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과 예측: 95% ‘필요하다’)

  • 좋은 질문 (순위형 질문, Ranking Question): “정부가 다음 5가지 과제 중 한정된 예산을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서대로 1위부터 5위까지 순위를 매겨주십시오.” [ ]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 [ ] 노인 복지 확대 [ ] 국가 안보 강화 [ ] 환경오염 문제 해결 [ ] 저출산 문제 대응

순위형 질문은 응답자에게 가혹한 선택을 강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정책의 상대적 중요도와 우선순위에 대한 매우 명확하고 실행 가능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개념’에서 ‘현실’로: 비용과 편익을 묻는 트레이드오프 측정

모든 정책에는 반드시 **‘비용(Cost)’**이 따릅니다. 그 비용은 세금일 수도 있고, 다른 정책의 축소일 수도 있으며, 특정 집단의 희생일 수도 있습니다. ‘필요성’ 질문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비용의 측면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현실적인 선택 상황을 제시하고, 그에 따르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 상충관계)’**를 함께 물어야만 진정한 여론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 나쁜 질문: “모든 대학생에게 등록금 반값 지원을 하는 정책에 찬성하십니까?”

  • 좋은 질문 (조건부 질문, Contingent Question): “모든 대학생에게 등록금 반값 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연간 약 5조 원의 추가 재원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를 위해 귀하의 소득세가 연간 10만 원 정도 인상된다면, 그래도 이 정책에 찬성하시겠습니까?”

이처럼 정책의 편익과 함께 그에 따르는 비용이나 현실적인 제약을 함께 제시하면, 응답자는 비로소 진지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이는 앞서 우리가 논의했던 **조건부가치법(CVM)**이나 **컨조인트 분석(Conjoint Analysis)**의 기본 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결론: 더 나은 정책 질문을 위한 설계 원칙

결론적으로, 정책의 필요성을 묻는 단 하나의 질문은 우리에게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합니다. 국민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더 나은 정책을 만들기 위한 조사는 다음의 설계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1. 추상적인 ‘필요성’ 대신, 구체적인 ‘지지’를 물어라: “OO 정책”처럼 모호하게 묻지 말고, “OO을 위해 O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OO을 하는 구체적인 계획”에 대한 찬반을 물어야 합니다.

  2. 절대적인 ‘필요성’ 대신, 상대적인 ‘우선순위’를 물어라: 여러 정책 대안들을 제시하고, 그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순위를 매기게 하거나 중요도를 평가하게 해야 합니다.

  3. 비용 없는 ‘필요성’ 대신, 대가가 따르는 ‘선택’을 물어라: 정책으로 얻는 편익과 함께, 우리가 감수해야 할 비용(세금, 규제 등)을 함께 제시하여 현실적인 트레이드오프 상황에서의 판단을 물어야 합니다.

이처럼 질문의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95%가 동의하는 뻔한 결과’를 넘어, 정책 결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살아있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단순한 동의가 아닌, 깊이 있는 고민을 이끌어내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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